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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칼럼] 야구와 경제_동대문야구장의 경제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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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울시야구소프트볼협회 조회 367회 작성일 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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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에 있는 동대문은 우리나라 보물 1호이다. 동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에서 동쪽에 해당하는 인(仁)을 흥하게 한다는 의미로 흥인문(興仁門)이다. 흥인문은 숭례문 등과는 다르게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한양 도성은 전형적인 서고동저(西高東低) 지형이었다. 동쪽이 낮고 평탄해서 도성 내의 물이 동쪽으로 흘렀다. 그래서 도성의 동쪽 터는 진펄이었고 지반이 약했다. 동쪽에 대문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반 공사를 해야 했다. 나무 말뚝을 박고 장대석을 채워 지반을 다진 후 성문을 세웠다. 이런 과정 때문에 흥인문은 한양도성의 문중에 가장 늦게 완공되었다. 흥인문 일대는 지반이 물러서 군사적으로도 취약했다. 그래서 흥인지문과 광희문 주변에는 효종이 친애했던 어영청, 무관 선발과 병법 훈련을 관장하던 훈련원(訓鍊院),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 등 군사시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지반뿐 아니었다. 동쪽의 내사산인 낙산(駱山) 역시 상대적으로 산세가 약했다. 약한 동쪽의 기운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풍수지리상 산맥의 뜻이 담긴 '지(之)'를 이름에 덧붙였다. 이렇게 흥인문은 '흥인지문'으로 거듭났다.

1907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이후 훈련원 공터, 하도감 등의 군사 훈련장은 사실상 방치상태였다. 선교사들은 이를 스포츠 공간으로 활용했다. 훈련원 마당은 각종 학교나 공장직원들의 대규모 체육대회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훈련원 공터와 하도감은 이렇게 한국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일제는 1925년부터 그 터에 경성 운동장을 조성했다. 1926년 3월 축구장(9천 평)과 야구장(6천 평)을 준공했다.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의 이름은 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다. 서울운동장은 각종 고교야구대회와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함께하며 우리나라 근현대 스포츠의 성지로 자리했다. 88 올림픽 때문에 '서울'이라는 이름을 잠실운동장에 내어 주며 '동대문'이라는 새 이름표를 받았다. 동대문야구장은 일제강점기에 건립하여 2008년 철거하기까지 80년 넘게 우리 민족의 아픔과 부활을 함께한 공간이다. 낡고 노쇠했다고 쉽게 허물어 버릴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다.

문화예술 경제학의 대가인 보몰(William J. Baumol)은 그의 저서 'Performing Arts'에서 문화예술 지원에 관한 통찰을 보였다.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근거를 선택가치, 존재가치, 유산가치, 명성가치, 혁신가치 등으로 구분했다. 이중 동대문야구장은 유산가치에 해당한다. 유산가치는 현세대의 관점이 아닌 미래세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가치이다. 미래세대는 자신의 선호를 현시점의 시장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의 후손을 위해 보호하고 물려줘야 하는 전통이다.

동대문야구장처럼 역사적 의미가 담긴 재화는 그 가치를 책정하기 어렵다. 시장에서 거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건부가치측정법(Contingent Valuation Method, CVM)을 사용한다. 조건부가치측정법은 비시장적 재화의 경제적 가치를 추정하는 방법이다. '당신께서 느끼는 동대문야구장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입니까?'라고 묻는 방식이다. 실제로 동대문야구장에 관한 조건부가치측정을 시행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양도성의 방어를 위한 군대 주둔, 일제에 의한 군대 해산, 선교사들이 스포츠 공간으로 활용, 우리나라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흐름은 동대문야구장이 쉬운 철거 대상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격언이 스포츠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조용준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KBO 자문위원